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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자서전내 촛불시위와 미국산 쇠고기시위 그리고 fta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5/01/29/0505000000AKR20150129001300001.HTML

◇광우병 사태 = 대통령 취임을 일주일 앞둔 2008년 2월 18일, 청와대 관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마주했다. "한·미 쇠고기 협상을 마무리 짓기로 부시 대통령과 수차례 약속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남은 임기 중 처리해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노 대통령은 미국과 약속했다는 점은 시인하면서도 한·미 쇠고기 협상이 타결된다고 미국 의회가 FTA(자유무역협정)를 처리해준다는 보장이 없다고 했다. 결국 나는 한·미 쇠고기 협상과 관련하여 큰 딜레마를 안고 대통령에 취임해야 했다.

야당과 시민단체 등은 재협상을 요구했다. 2008년 6월 7일, 나는 쇠고기 협상과 관련하여 부시 대통령과 통화를 했다.  

"미국 정부가 30개월령 미만의 쇠고기 수출에 대해 우리 국민이 신뢰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0개월령 이하의 소만 한국으로 수출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점을 이 대통령께 보장하겠습니다.” 

부시는 내 제안을 수락했다. 부시와의 통화를 마친 후 추가 협상을 진행하도록 했다. 

쇠고기 사태는 한·미 관계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도 중요한 계기가 됐다. 국민과 소통의 중요성을 체감하는 계기도 됐다.

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9/2015012901540.html?related_all

이명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2008년 정권 인수기에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한·미 쇠고기 협상을 임기 내에 마무리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노 대통령이 거절했다고 밝혔다. MB는 회고록에서 “노 전 대통령이 한·미 쇠고기 협상을 마무리 짓고 떠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이 취임 일주일을 앞둔 시점, 청와대 관저에서 이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과 마주했다. 이 전 대통령은 “한·미 쇠고기 협상을 마무리 짓기로 부시 대통령과 수차례 약속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남은 임기 중 처리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노 전 대통령에게 물었다.

노 대통령은 미국과 약속했다는 점은 시인하면서도 한·미 쇠고기 협상이 타결된다고 미국 의회가 자유무역협정(FTA)를 처리해준다는 보장이 없다고 답하며 임기내 소고기 협상 타결을 거절했다.

그러면서 이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 어차피 미국과 FTA 문제를 다시 논의해야 하고 미국이 자동차 문제를 재협상하자고 나올 테니, 그때 가서 쇠고기 협상을 조건으로 내세워 자동차 재협상을 유리하게 가져가라는 ‘조언’을 덧붙였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9/2015012900977.html?related_all

이명박 전 대통령(MB)은 미국과의 쇠고기 수입 협상이 촉발한 ‘광우병 파동’ 탓에 정권 초반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이는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정국과 마찬가지로 국내 모든 정치·경제·사회·문화 이슈를 잠식했다.

해결의 실마리가 잡힌 건 2008년 6월. 한·미 양 정부가 30개월령 이상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 추가논의를 하기로 합의하면서다. 당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MB와의 전화 통화에서 “쇠고기 협상으로 인해 이 대통령께서 고초를 겪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합니다”며 추가 협상 제안을 수용했다.


논의가 시작되자, 이제는 용어를 ‘추가 협상’으로 할지, ‘재협상’으로 할지를 두고 청와대 수석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당시 수십만 시위대는 기존 협상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수준인 ‘추가 협상’이 아니라 원점에서 다시 논의하는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동관 당시 대변인의 말.

“추가 협상이 재협상이냐 아니냐는 구도로는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재협상이 왜 불가한가’하는 내용들이 조금씩 언론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재협상이 국익에 어떤 피해를 끼치며, 왜 추가 협상을 해야 하는지를 설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종찬 민정수석은 다른 의견을 냈다.

“지금 우리가 추가 협상을 통해 사실상 재협상을 하고 있는 셈인데, 재협상이 아닌 듯하고 있어 시위대가 계속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걸 잘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재완 정무수석이 재반론을 폈다.

“’추가 협상이 사실상 재협상이다’는 말로 설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시위대 주장대로 재협상을 하면, 앞으로 5년 동안 정부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정부가 무능해서 협상을 잘못했거나, 겁박에 굴복했다는 것 두 가지 중 하나에 해당됩니다.”


이종찬 민정수석은 다시 반론을 폈다.

“광우병 단체들의 논리는 우리가 전문성을 가지고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어요. 문제는 국민이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사실상 재협상 아닙니까? 그런데 그 효과를 못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좀 더 빨리 재협상이라는 용어를 썼다면 국민들과 광우병 단체들이 분리됐을 겁니다.”

곽승준 국정기획수석이 맞장구를 쳤다.

“지금 집회에 나오는 어린 학생들은 재협상, 추가 협상이 뭔지 잘 몰라요. 그 친구들 ‘아, 우리가 이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을 따름이에요. 국민이 듣고 싶은 말을 좀 더 빨리 해줌으로써 사태를 진정시킬 기회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종찬 수석님 말에 100% 동의합니다.”


그러나 결국 MB는 재협상 혹은 사실상 재협상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추가 협상이라는 용어를 고수했다. 그는 이에 대해 “국익이 손상되더라도 ‘재협상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협상을 파기하면 광우병 집회도 끝나고 정치적 타격도 훨씬 적었을지 모른다”며 “그러나 국가 이익을 지키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9/2015012901800.html?related_all

이명박 전 대통령(MB)은 <대통령의 시간>에서 노무현 정부 당시 공공기관이 늘어났다고 지적하며 공공기관 효율화를 위해 민영화를 추진했다고 말했다. MB는 회고록에서 “공공기관 민영화가 중단된 노무현 정부 때 45개 공공기관이 신설됐다. 그 사이 인력 규모는 약 6만 7000여명 증가했고 예산은 102조원 늘었다”고 설명했다.

업무 효율도 떨어졌다고 했다. MB는 “인건비 과다 지급, 복지기금 등의 부정적 집행 등 비효율적 조직 운영으로 예산낭비를 유발해 국민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었다”고 서술했다.

2008년 6월 18일 MB는 특별 기자회견을 통해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을 밝혔다. MB는 “(선진화 방안은) 작은 정부 큰 시장 지향, 국민 편익 증대, 사회적 비용 최소화, 기관별 특성화 방안 수립이라는 4가지 원칙하에 추진됐다”고 설명했다.

MB는 이 같은 배경을 전제로 공공기관 민영화의 정당성을 회고록에서 설파했다. 당시 MB는 한국문화진흥, 한국자산신탁 등 자회사 10개와 산업은행, 기업은행 등 금융 공기업 7개를 비롯해 19개 공공기관을 민영화하려 했다. 또 인천국제공항공사와 한국공항공사 등 5개 공공기관 지분 일부 매각도 추진했다.

하지만 7개 공기업만 민영화됐다. MB는 공공기관 민영화가 제대로 추진되지 않은 이유를 세계 금융위기와 광우병 파동으로 번진 정치적 반대 세력 때문이라고 말했다. MB는 회고록에서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가운데 금융 공기업 선진화를 추진할 여력이 없었다”며 “(공공기관이 민영화되면) 물값이 100배 오른다는 식의 민영화 괴담이 퍼졌다. 왜곡된 정보에 의해 공공기관 선진화 추동력이 약화됐다”고 밝혔다.

MB는 이 당시 상황을 두고 “정치적 논리에 의해 공공기관 개혁 취지가 왜곡되고 추동력이 약해진 점과 어려운 경제 여건으로 집행에 어려움이 있었던 점은 아쉽다”며 “나는 당시 그러한 상황을 보면서 대통령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했다”고 덧붙였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0129_0013444397&cID=10301&pID=10300
29일 뉴시스가 입수한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이 전 대통령은 "'뼛조각 사건' 이후 일련의 사태로 우리 국민은 '미국산은 30개월 미만의 뼈없는 쇠고기만 안전하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며 "그러나 전임 정부가 미국에 국제수역사무국(OIE) 권고를 존중해 쇠고기 협상을 타결하겠다고 한 약속은 그대로 살아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 전 대통령은 "국민을 안심시키려면 미국과의 약속을 깨야했고, 약속을 지키자니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형국이었다"며 "전임 대통령이 여러차례 약속한 상황이라 협상의 여지도 크지 않았고 미국은 OIE 기준 준수를 요구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대통령 취임을 앞둔 2008년 2월18일 청와대 관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만난 일화를 소개하면서 "노 전 대통령은 미국과 약속했다는 점은 시인하면서도 한미 쇠고기 협상이 타결된다고 해서 미국 의회가 FTA를 처리해준다는 보장이 없다고 했다"며 "취임한 뒤 미국과 FTA 문제를 논의할 때 쇠고기 협상을 조건으로 내세워 자동차 재협상을 유리하게 가져가라는 조언을 했다"고 말했다.

광우병 사태에 대해서는 "일부 정치 세력이 괴담을 퍼뜨리고 공포를 조장하는 상황에서 일단 국민을 안심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동시에 국민의 비판도 겸허히 받아들였다. 국민 건강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소통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부족했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도 "집회가 정권 퇴진 주장 양상으로 변하자 일각에서는 17대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대선 불복 세력이 집회를 주도한다는 분석도 나왔다"며 "정치 세력들이 집회에 개입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또 "광우병 사태는 청와대 1기 참모진의 사퇴 이외에도 국정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며 "이후 국정 운영에서 국민과의 소통이 주요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광우병 사태의 교훈이었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1년 한미 FTA 체결과 관련해서는 "여당 내에서도 청와대의 정무분야 참모들도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FTA 체결은 정치적 이해득실을 넘어 나라의 명운을 좌우하는 문제라는 면에서 정치적으로는 손해가 되더라도 국익 차원에서 반드시 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당시 민주당이 '국가소송제(ISD)' 조항을 문제 삼은 것에 대해서는 "실제로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한미 FTA 자체를 무산시키려 한게 아닌가 생각했다"며 "결국 한미 FTA 비준안은 야당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여당 단독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고 말했다.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205606&ref=t.co/MksHu5Oyd3
◇광우병 사태 = 대통령 취임을 일주일 앞둔 2008년 2월 18일, 청와대 관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마주했다. "한·미 쇠고기 협상을 마무리 짓기로 부시 대통령과 수차례 약속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남은 임기 중 처리해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노 대통령은 미국과 약속했다는 점은 시인하면서도 한·미 쇠고기 협상이 타결된다고 미국 의회가 FTA(자유무역협정)를 처리해준다는 보장이 없다고 했다. 결국 나는 한·미 쇠고기 협상과 관련하여 큰 딜레마를 안고 대통령에 취임해야 했다. 

야당과 시민단체 등은 재협상을 요구했다. 2008년 6월 7일, 나는 쇠고기 협상과 관련하여 부시 대통령과 통화를 했다.  

"미국 정부가 30개월령 미만의 쇠고기 수출에 대해 우리 국민이 신뢰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0개월령 이하의 소만 한국으로 수출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점을 이 대통령께 보장하겠습니다.” 

부시는 내 제안을 수락했다. 부시와의 통화를 마친 후 추가 협상을 진행하도록 했다.

쇠고기 사태는 한·미 관계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도 중요한 계기가 됐다. 국민과 소통의 중요성을 체감하는 계기도 됐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3607
이 전 대통령은 한미FTA의 선결 조건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건 관련 "(인수위 시절 참여정부의) 한덕수 총리가 우리 측 인사를 통해 내가 대통령을 직접 만나 해결하는 길밖에 없을 것 같다는 뜻을 전해왔다"며 "대통령 당선인인 내가 제안한다면 생각을 바꿀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취지라고 생각했다"고 당시 노 대통령을 만난 배경을 설명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08년 2월 18일 청와대 만남은 성과 없이 끝났다"며 "결국, 나는 한미 쇠고기 협상과 관련하여 큰 딜레마를 안고 대통령에 취임해야 했다. 일련의 사태로 우리 국민들은 '미국산은 30개월 미만의 뼈 없는 쇠고기만 안전하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그런데 전임 정부가 미국에 'OIE 권고를 존중하여 한미 쇠고기 협상을 타결하겠다'고 한 약속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고 밝혔다.  

국제수역사무국(OIE) 권고에 따르면 미국과 같은 당시 ‘광우병 위험통제국’ 쇠고기 교역에서 7가지 광우병 위험물질(SRM)을 뺄 경우, 30개월령 이상 쇠고기를 수입하도록 돼 있다. 

이 전 대통령은 "국민을 안심시키려면 미국과의 약속을 깨야했고, 약속을 지키자니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형국이었다"며 "전임 대통령이 여러 차례 약속한 상황이라 협상의 여지도 크지 않았고 미국은 OIE 기준 준수를 요구했다"고 덧붙였다.

 
"촛불 집회, 순수한 국민 뜻 편승해 대통령과 정권 무너뜨리려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 협상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한 뒤 "우리 측 협상단은 4월 16일 '협상 중단'이라는 초강수까지 두면서 협상에 임했다"며 "그 결과 강화된 사료 금지 조치 및 쇠고기 연령 표시 등 미국 측 양보를 다수 얻어냈다. OIE 기준보다 강화된 타협안이었다"고 당시 쇠고기 협상을 평가했다. 

하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한미 정상회담을 위한 졸속 협상을 했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이 전 대통령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반응이지만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며 "수차례의 한미 정상 간 약속으로 협상 여지가 좁아진 것이 바로 그들이 집권하던 때 벌어진 일이었다"고 불만을 표현했다. 

미국산 쇠고기 협상으로 5월부터 청계광장에서 진행된 촛불집회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을 할애해 자신의 당시 심경을 설명했다. 이 전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에는 (광우병) 괴담이 연예인 팬클럽으로 확산된 결과, 여중고생들이 참석자의 주류를 이뤘다"며 "여기에 일부 연예인들이 동참하면서 집회는 급속히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이후 공기업 노조를 비롯해 시민단체 등도 집회에 합류하기 시작했다"면서 그 이유에 대해 "새 정부의 공기업 개혁에 대한 논의가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해석했다. 당시 이명박 정부가 공기업 조직을 통폐합하고 정원을 줄이며, 일부 공기업은 민영화를 추진할 것이라는 전망이 공기업 노조를 자극했다는 것. 여기에 위기감을 느낀 임직원들에게 쇠고기 수입 허용 조치는 정부에 저항하는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이 전 대통령은 분석했다.  

뿐만 아니라 이 전 대통령은 정치 세력들도 집회에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대선 불복 세력이 건강을 염려하는 순수한 국민들의 뜻에 편승해 대통령과 정권을 무너뜨리려 했다는 것. 

이에 상황을 수습하려 했으나 당시 조건은 집권여당에 모두 불리한 조건이었다고 이 전 대통령은 평가했다. 공영방송은 전임 정부가 임명한 경영진과 노조가 좌우하고 있었고 국회 역시 임기가 1개월 남짓 남은 17대 국회의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 이 전 대통령은 이런 국회의원들에게 의욕이 있을 리 없었다고 꼬집었다.  

이 전 대통령은 당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 배경을 두고도 "일부 정치 세력들이 괴담을 퍼뜨리고 공포를 조장하는 상황에서 일단 국민을 안심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정부의 입장을 국민에게 합리적으로 전달할 통로가 막혀 있었다. 대통령‧실장 중심으로 모든 수석이 언론사를 분담해 언론사 간부들과 기자들을 만나 이 문제를 설명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밝혔다.  

"광우병 파동 때, 원칙 지킨 것이 국제사회에 깊은 인상" 


이 전 대통령은 "경찰이 청와대로 향하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무리하다가는 자칫 불의의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걱정에 '시위대가 청와대에 들어오는 일이 있더라도 인명 피해가 있으면 절대 안 됩니다.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대처해주세요'라고 어청수 경찰청장에게 당부했다"며 "('명박산성'에 대해) MB식 소통이 이런 것이냐' 하는 비판이 있었지만 그 덕분에 물리적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비판을 받은 '회전문 인사'도 언급했다. 당시 광우병 파동으로 이명박 정부 1기 청와대 참모진 6명이 사퇴했다. 이 전 대통령은 "광우병 사태는 전체 내각이 책임질 일이 아니었다"며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사퇴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퇴한 6명에 대해 "가슴이 아팠다"며 "이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시 정부를 위해 일하도록 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사퇴를 수락했다"며 "이날 사퇴한 참모진 대부분은 임기 중 다시 중용되어 국가를 위해 큰일을 했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은 광우병 파동으로 얻은 점도 많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은 "광우병 사태가 터졌을 때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은 우리 정부가 결국 정치적 결정을 내릴 것이라 전망했다"며 "그러나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끝까지 원칙을 지킨 것이 국제사회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고 자기 나름의 성과를 언급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9/2015012901544.html?related_all

이명박 전 대통령(MB)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2010년 한·EU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당시 이탈리아가 반대입장을 밝혔으나 자신이 직접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를 만나 설득해 통과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EU 27개 회원국 관계장관은 2010년 9월 10일 특별이사회를 열고 한·EU FTA 승인 여부를 논의했다. 승인은 이탈리아 반대로 연기됐다. 당시 MB는 야로슬라블 세계정책포럼 참석차 러시아 방문 중이었다.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총리도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에 와 있었다.

MB는 회고록에서 EU가 자신에게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직접 설득할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탈리아 실무진은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한·EU FTA에 대한 입장을 바꿀 것을 우려해 한국 정상과 정상회담을 반대했다. 그러던 중 MB는 우연히 메드베데프 당시 러시아 대통령, 베를루스코니 총리 등과 만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MB는 만찬 분위기가 무르익자 베를루스코니 총리에게 다가가 협조를 요청했다. MB는 “EU 장관회의가 한·EU FTA에 사인을 못했다고 합니다”라며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열릴 미팅에서 이탈리아가 협조해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베를루스코니는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MB는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믿는다고 말하며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았다.

2010년 9월 17일 이탈리아가 발효 시기 연기를 전제로 반대 입장을 철회했다. EU 특별이사회는 한·EU FTA를 승인했다. 한·EU FTA는 2011년 2월 유럽 의회를 통과했고, 2011년 5월 우리 국회도 비준 동의했다. 2011년 7월 1일 한·EU FTA가 잠정 발효됐다.

MB는 한·EU FTA에 대한 이탈리아 입장을 바꾸는데 베를루스코니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 한 약속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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