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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자서전내 경제 정책에 관련내용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9/2015012901323.html?related_all
이명박 전 대통령(MB) 정부는 임기 초반 환율이라는 까다로운 상대를 만났다. 당시는 달러에 대한 원화가치가 하락하면서 수입물가가 크게 오르던 시기다. 이는 국내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삼성전자(005930) (1,369,000원▲ 9,000 0.66%), 현대자동차(005380) (170,000원▲ 3,000 1.80%)등 대기업은 수출 채산성이 높아지면서 호황을 맞이했다.

주식시장 3대 호황주를 묶어 부르는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이라는 말도 이 때 생겨났다. 국민은 가난해지고, 기업은 부자가 되는 시기였던 셈이다.

MB는 <대통령의 시간>에서 취임 초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해 환율을 하락(원화 강세)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외환보유액 고갈을 우려해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물가 상승을 피하기 위해 외환위기를 불러들일 수 없었다는 뜻이다.

“환율을 인위적으로 낮추려면 외환보유고를 지속적으로 풀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의 외환보유고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환율이 하락하면 수출이 줄고 수입이 늘어 외환보유고가 감소한다. 물가 안정을 위한 외환시장 개입은 이처럼 외환보유고를 이중으로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우리 경제 상황을 1997년 외환위기 직전 3년과 비슷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세계 경제는 10년 호황을 마감하고 이제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경상수지와 외채는 위험한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MB에게 보고했다. 그러면서 경상수지 개선을 위해 환율이 적정 수준에서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위적인 환율 인하 정책을 쓰지 말자는 뜻이다.

MB는 결과적으로 이 같은 정책을 유지한 덕분에 금융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그는 “야권의 요구대로 취임 초부터 물가 안정을 위해 저환율정책을 썼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고 외환보유고는 소진된 상태에서 금융위기를 맞았을 것이니, 우리 국민은 1997년에 이어 또 다시 외환위기의 고통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되뇌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9/2015012900605.html?related_all
<대통령의 시간>엔 2008년 미국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이 실감나게 묘사돼 있다. 그 중 2008년 9월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을 발행하려다 실패한 뒤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질책당한 내용이 눈에 띈다.

외평채는 외환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달러화를 기준으로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이다. MB는 금융위기가 본격화되기 전인 2008년 9월 외평채 발행에 성공했다면 외환 수급이 조기 안정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로이터 통신도 2008년 10월 한국 시중은행들의 극심한 달러 가뭄을 거론하며 ‘한국 정부가 지난달 초 10억 달러 규모 외평채 발행을 미루지만 않았어도 상황이 지금보다는 좋았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MB는 청와대 경제 상황 점검 회의 때 강 전 장관을 강하게 질책했다.

이는 기재부와 강 전 장관으로서는 다소 억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기재부는 외평채 가산금리(국가 신인도에 따라 추가로 붙는 금리)가 너무 높다는 이유로 외평채 발행을 포기했다.

강 장관은 “금융위기가 터질 줄 아무도 몰랐다. 그때 우리 외평채의 가산금리가 2.5%포인트까지 올랐다. 그렇게 높은 금리로 한국이 국채를 발행하면 오히려 국제사회에 ‘한국 경제가 어렵다’는 신호를 줄 수 있다”고 대답했다. MB는 당시 상황에 대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강 장관이 대답했다. 강 장관은 억울하다고 생각되면 곧잘 흥분해 얼굴에 나타났다”고 썼다.

박병원 경제수석도 거들었다. 박 수석은 “실무자들은 너무 비싼 가격으로 발행했다가 나중에 책임 추궁을 당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한다. 상황이 좋을 때 차입할 생각으로 미루다 그렇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외평채 발행 실패로 궁지에 몰렸던 강 전 장관은 10월 한미 통화스와프 협정을 성사시키며 가까스로 위기를 탈출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윤증현 차기 기재부 장관에게 자리를 넘기고 퇴장할 수 밖에 없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9/2015012900609.html?related_all
한·미 통화스와프가 1대1의 협상이었다면, 일본과 협상은 일본의 중국 견제 심리를 이용한 삼각 협상이었던 것으로 MB는 묘사했다. 한국은 2008년 12월 일본과도 300억달러 규모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 첫 논의는 2008년 10월 11일 한·일 재무장관 회담에서 시작했다.

한 달 뒤인 11월 11일 일본은 우리나라에 30억달러 수준의 통화스와프를 제안했다. 당초 기대에 크게 못미치는 금액이었다. 한국이 거절하자 일본은 50억달러를 제안했다. 또 거절하자 70억달러를 제안했다. 그마저 거절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MB)은 당시 일본 실무자들이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일본계 자금은 한국의 외환 수급에 협력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도 꺼냈다고 회고했다. 이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는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해 한국에 투자한 유럽과 선진국 자본이 빠져나간 것이 1차 요인이었다. 특히 일본이 100억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인출해간 것이 결정타였다.

일본과 협상이 난항에 빠지자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중국과 협상에 나섰다. 셰쉬런 중국 재정부장을 만나 “한·중 통화스와프는 위안화가 기축통화로 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중국은 300억달러 규모 통화스와프를 흔쾌히 승인했다. 다급해진 건 일본이었다. MB는 일본 재무성 고위 관계자가 한국 기재부에 전화를 걸어 한·중 통화스와프 합의 사실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썼다.

결국 일본은 고압적인 자세를 버리고 한국과 300억달러 규모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 일본은 중국과 체결 사실을 발표하기 전에 일본과 먼저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고 발표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중국·일본과 통화스와프 체결 사실은 그 해 12월 13일 일본 후쿠오카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동시 발표됐다. MB는 “당시 중국과 일본은 아시아 주도권을 놓고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CMIM) 회의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9/2015012900608.html?related_all

미국·일본·중국과 통화스와프 체결은 2008년 금융위기 극복의 전환점이었다. 통화스와프는 약정 환율에 따라 자국의 통화를 맡겨 놓고, 상대국의 통화를 빌어오는 외환 거래를 말한다. 금융위기로 달러가 부족해지는 상황에서 미리 정해 놓은 금액만큼 달러를 빌려올 수 있는데, 그만큼 외환보유액이 늘어나는 것과 비슷한 효과가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MB)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당시 3국과 잇따라 체결한 통화스와프 체결 비사를 소개했다.

기획재정부·한국은행이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막후에서 추진한 건 미국이 2008년 9월 호주·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4개국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직후다.

MB는 협상 초기 미국이 한·미 통화스와프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때까지 미국은 유럽연합(EU)·일본·영국·스위스·캐나다 등 신용등급 ‘AAA’ 수준의 선진국만을 대상으로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 당시 우리나라 신용등급은 ‘A’였다. 기재부와 한국은행이 계속해서 한·미 통화스와프를 추진하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관계자는 한국은행 관계자에게 ‘통화스와프가 뭔지나 아느냐’며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2008년 10월 15일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미 통화스와프 성사 가능성을 51%라고 MB에게 보고했다. 강 장관은 “우리가 보유한 미국 국채를 내다팔 경우 한국은 통화스와프 없이도 위기 관리가 가능하다”며 미국을 압박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원화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국채를 국제 금융 시장에 내다 팔아 외화를 조달했다. 그로 인해 미 국채 가격이 하락했고, 미국 정부는 이에 불만이 가득했다. “호주와는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면서, 경제 규모가 더 크고 국제통화기금(IMF) 지분이 높은 한국을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논리도 폈다.

결국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보름여 후인 2008년 10월 29일 300억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승인했다. 당시 1427원까지 치솟았던 원·달러 환율은 1250원으로 떨어졌다. 주가도 968포인트에서 1084포인트로 12% 올랐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9/2015012901778.html?related_all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한국은행은 기획재정부와 함께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돈을 풀기 위해 기준금리를 인하하라는 압박이 컸지만, 한국은행은 오히려 금리를 인상하거나 미국·유럽 대비 소폭 인하에 그치면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전임 노무현 정부때 임명됐던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에 대한 시선이 고울 리 없다. 청와대 안팎에서 경질론이 고개를 들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MB)은 당시 이 총재에 대한 경질론에 강만수 기재부 장관과 박병원 경제수석이 적극 반대했다고 회고했다. 박 수석은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한국은행 총재를 경질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경질을 반대했다. 강 장관은 거시 정책에 대해 이 총재와 의견차가 컸지만 경질에는 반대했다. 이 총재는 2010년 3월까지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이 총재는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왜 금리를 인하하지 않았을까. MB는 회고록에 “이 총재는 한국은행이 물가의 최후 보루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였다. 위기 극복을 위해 과감한 환율 및 재정정책이 병행되는 상황에서 한국은행마저 금리를 큰 폭으로 인하한다면 물가상승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라고 썼다.

당시는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수입 물가와 소비자 물가 역시 고공행진 하던 시기다. 금리까지 인하할 경우 시중에 돈이 급속도로 풀리면서 물가 상승에 부채질을 할 수 있다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행도 끝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2008년 10월 9일 이후 국제 금융시장의 자금 경색은 더욱 가속화됐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선진국들은 ‘제로(0)’ 금리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으로 금리 인하에 나섰다. 한국은행은 역시 2주 만인 10월27일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추가 인하했다. 이후 한국은행은 2009년 2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연 2%까지 인하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9/2015012900760.html?related_all
노무현 정부는 급등하는 집값을 잡기 위해 임기 내내 총부채상환비율(DTI), 주택담보대출비율(LTV) 규제를 강화했다. DTI·LTV는 쉽게 말해 주택구매시 은행에서 빌릴 수 있는 돈을 제한하는 것이다. DTI·LTV 규제를 강화할수록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사는게 어려워진다. 이는 집값 안정에는 도움이 되지만, 부동산 경기 하락으로 이어진다. 경제계는 이명박(MB) 정부 들어 DTI·LTV 규제가 대폭 완화되지 않겠냐는 기대가 컸다.

<대통령의 시간>에는 주택 가격을 반등시키기 위해 DTI·LTV 규제 완화를 추진했다 포기한 장면이 나온다. MB는 2010년 8·29 부동산 대책에도 불구하고 주택 가격이 지속적으로 떨어지자 DTI·LTV 규제 완화 검토를 지시했다. 그러나 김대기 청와대 경제수석은 가계부채 문제를 의식해 이에 적극 반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김 수석의 말.

“현재 주택 수요 둔화는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구조적 요인이 큽니다. 설사 주택담보대출이 늘어나도 그 돈의 절반 이하 정도만 주택 구매에 투입되기 때문에 효과가 크지 않습니다. 반면 가계대출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대통령님, 주택 경기 침체와 가계대출 부실 문제는 차원이 다릅니다. 가계대출은 핵폭탄급입니다. 문제가 불거지면 나라가 흔들리게 됩니다.”

MB는 김 수석 의견을 받아들여 끝내 DTI·LTV 규제를 풀지 않았다. 대신 바닥난방이 갖춰지지 않은 오피스텔까지 임대주택으로 허용한 정책은 서민 주거 안정에 기여했다고 자평했다.

당초 국토부는 바닥 난방이 가능한 오피스텔만 임대주택으로 허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시 33만호가 넘는 오피스텔 재고 물량 중 바닥 난방이 갖춰진 경우는 일부에 불과했다. MB 정부는 2012년 4월 국무회의에서 바닥 난방 규정을 삭제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확정했다. 이후 33만호가 넘는 오피스텔 재고 전체가 주거용 임대주택으로 전환됐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9/2015012901776.html?related_all

이명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2010년 집값 하락에 따른 비난 여론을 의식했지만 부동산 정책기조는 바꾸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경제 부처 장관들은 집값 하락을 정상화 과정이라 판단하고 거래 활성화에 정책 기조를 맞춰야한다고 입을 모았다.

MB는 수요 규제보다 공급에 무게를 두는 시장 친화적인 부동산 정책을 선택했다고 회고했다. 그 결과 2009년부터 주택 가격 상승폭이 눈에 띄게 줄고 2010년부터는 서울 강남 등 인기 지역을 중심으로 주택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택 가격이 떨어지자 정치권 중심으로 부동산 정책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MB는 2010년 7월 28일 당시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에게 “집값이 비정상적으로 올랐다가 떨어지는 것 아니냐”며 “고소득층이 가진 비싼 대형아파트가 거래가 없어 가격이 떨어진다고 부동산 정책을 다시 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이에 “주택 가격이 정상화되는 과정”이라며 “집값 하락에 대한 정치권 공세가 거센 것이 놀랍다”고 대답했다.

윤증현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정치권이 집값 오를 때는 가만히 있다가 조금 떨어지니깐 야단법석이다”라며 “서민 입장에서 집값은 아직도 비싸다”고 정치권에 대한 불만을 털어놨다. 윤 장관은 또 “거래 회복에 중점을 두고 정책을 펴야하는지 아니면 많이 올라있는 주택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전략적 인내가 필요한 것인지 결정해야할 듯하다”고 말하며 시장 변화를 지켜보자고 주장했다.

김종창 당시 금융감독원장은 “실거래가 위축돼 새로 아파트에 입주하려고 해도 기존 아파트가 팔리지 않아 이사를 못하는 사람이 많다”며 “투기 목적이 아닌 주거 목적으로 집을 매매하는 사람들이 특히 더 그렇다”고 말했다.

백용호 정책실장도 “집값이 떨어지니 추가로 떨어질 것을 기대하며 주택 구입을 미루는 심리가 작용해 부동산 거래가 실종된 것”이라며 “집값하락으로 전세물량이 월세물량으로 전환돼 전세값도 폭등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종환 장관은 주택 경기침체에 따른 문제점을 지적했다. “미(未) 입주가 지속되면서 중도금 연체이자에 따른 가계 부담도 높아지고 있다. 거기에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면서 이사, 중개, 임대업 등 주택 관련 서민업종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MB정부는 2010년 8월 29일 부동산 활성화 대책을 내놓았다. 분양가 상한제는 그대로 두고 2011년 3월 말까지 비강남권 무주택자와 1가구 1주택자에 대한 총부채상환비율(DTI) 적용 폐지하는 내용이 담긴 방안이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9/2015012902567.html
1기 참모진 사퇴에 대해 MB는 “가슴이 아팠다”고 술회했다. 특히 류우익 대통령 실장에 대한 평가가 돋보인다.

“류 실장은 취임 전부터 내가 펼치고자 했던 정책을 깊이 이해했던 사람 중 한 명이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행정 경험이 있었고 세계지리학연합회 사무총장을 맡을 정도로 글로벌한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내가 1기 대통령실장으로 류 실장을 임명한 것은 그 같은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류 실장 후임인 정정길 대통령실장에 대해서는 “정 실장 역시 교수 출신이지만 여야를 아우르는 폭넓은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나와는 학창시절 6·3 민주화운동을 함께했던 동지이기도 했다. 광우병 사태 이후 정국을 안정시키고 우리 사회 전반의 이해와 협력을 얻어내는 데 적임이라 생각했다”고 썼다.

MB는 또 박형준 홍보수석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 전반적인 동향과 여론 분석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정부의 친서민정책에 애정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MB는 2009년 6월22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형준 수석이 보고한 여론 동향을 듣고 참모들에게 서민 경제에 신경쓸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 후한 경제 참모들에 대한 평가

2008년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가장 의지했던 인물들에 대한 평가에서는 개인에 대한 애착이 묻어난다.

MB는 강만수 기재부 장관에 대해 “열정적이고 순수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억울하다고 생각되면 곧잘 흥분해 얼굴에 나타난다”고 썼다. 이는 2008년 9월 기재부가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발행을 포기한데 대해 강 장관을 질책하는 부분에서 나온다.

강 장관은 MB가 질책하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며 “당시는 우리 외평채 가산금리(국가 신인도에 따라 추가로 붙는 금리)가 2.5%포인트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높은 금리로 국채를 발행하면 오히려 국제사회에 ‘한국 경제가 어렵다’는 나쁜 시그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며 억울해 했다고 한다. 외평채로 궁지에 몰린 강 장관은 미국·일본·중국과 연이어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는데 동분서주 한다. MB는 당시 강 장관의 일처리에 큰 만족감을 표시했다.

의도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박병원 경제수석은 듬직한 인상으로 묘사됐다. 박 수석은 궁지에 몰린 관료나 동료 수석을 방어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박 수석은 강 장관이 외평채 문제로 질책을 받자 “어떻게든 상황이 좀 더 좋을 때 차입할 생각으로 미루다 그렇게 된 것 같다”고 거들었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 경질설이 부각되자 “경제위기 와중에 한국은행 총재를 교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적극 반대한 것으로 나온다.

강만수 장관 후임으로 지명된 윤증현 장관은 국제적 감각이 뛰어나고 신중한 성격으로 묘사했다. 다음은 윤 장관에 대한 MB의 평가.

“윤 장관은 경제계에서 폭 넓은 활동과 경험을 했다. 특히 각국 재무장관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아 G20 재무장관회의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지금 IMF 총재를 맡고 있는 크리스틴 라가르드 프랑스 재무장관과도 소통이 잘 됐다.”

이러한 일화도 있다. 윤 장관은 취임하면서 당초 3% 안팎으로 전망되던 2009년 경제성망률 전망을 -2% 안팎으로 수정 발표했다. 당초 윤 장관은 -3%까지 낮출 생각이었다고 한다.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4.3%였다. 그러나 경제심리 측면의 충격을 고려하여 -2%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9/2015012901501.html?related_all

이명박 전 대통령(MB)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감세정책’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노무현 정부 역시 감세정책을 펼쳤다며 민주당 등 야권 세력이 비난한 부자감세 비판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MB는 회고록에서 “(‘부자감세’라는 지적에 대해) 대다수 저소득층 근로자들의 근로 소득세가 면세되는 우리 실정을 무시한 주장이었다”고 밝혔다.

MB는 17대 대선에서 감세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낮은 세율, 넓은 세원’이 MB의 조세정책 기조였다. 당시 당내 경선을 벌였던 박근혜 후보 역시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를 슬로건으로 걸었다.

MB는 회고록에서 노무현 정부 역시 감세정책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MB는 “노무현 대통령은 감세를 하면 세수가 줄어 복지 재원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감세공약을 비난했다”고 설명했다.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감세론을 두고, 6조 8000억원 세수 결손을 가져올 수 있다며 비난한 일도 언급했다.

MB는 “(그러나) 감세를 비판했던 노무현 정부 역시 감세하겠다고 발표했다”고 적었다.

MB는 대통령 취임 후인 2008년 6월, 공약대로 법인세율 3% 인하·소득세율 2% 인하 등을 골자로 한 세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민주당은 이를 두고 부자감세라고 비난했다.

당시 부자감세라는 야권 세력의 지적에 대해 MB는 “산술적 함정이 존재한다”고 반박했다. MB정부 초기 소득세 감세안을 보면 1200만원 이하 구간은 이전보다 25% 세금이 경감되고 8800만원 초과 구간은 5.7% 세금만 경감된다는 것이다.

MB는 “계층간 감세 비율을 떠나 감세정책은 투자와 소비를 촉진시키는 정책이었다. 세계 금융위기로 경기부양이 시급한 상황에 (감세는) G20이 선택한 국제 공조 차원의 대응책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부자감세라는 왜곡된 단순 논리로 치부될 일이 결코 아니었다”고 말했다.

MB는 “(법인세 인하)혜택은 기업뿐만 아니라 주주, 근로자, 협력업체 등 경제주체 전반에 골고루 돌아간다는 점, 그리고 기업의 투자심리를 부추겨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점을 들어 (세법 개정안 본회의 통과를 위해)설득했다”고 회고했다.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5/01/29/0505000000AKR20150129001300001.HTML


◇4대강 사업…"단기간 판단해 결론 내릴 문제 아냐" = 4대강 살리기 사업이 대운하를 건설하기 위한 위장 사업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퇴임 후 감사원의 4대강 살리기 사업 감사결과에서까지 나왔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수많은 하천 관련 전문가들이 공을 들여 기획한 것이다. 감사원의 비전문가들이 단기간에 판단해 결론을 내릴 수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대가뭄이 닥치자 4대강 반대자들은 '녹조' 문제를 들고 나왔다. 과거 가뭄이 오지 않아도 갈수기에는 4대강이 녹조로 뒤덮였던 사실을 외면한 주장이다.

4대강의 16개 보는 이 같은 역할('물그릇' 키우기)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야권의 후보는 자신이 당선되면 한강 수중보를 철거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물론 그 후보는 당선이 된 후 시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한강도 잠실과 김포 신곡에 수중보가 있어 항상 맑은 물이 풍부하게 넘쳐흐른다는 사실은 서울 시민 중에도 아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무상복지…"무상복지로 가난한 사람 복지예산 줄어 안타까워" = 서울시장 재임 시절 내가 한 일 중에는 내 삶의 경험에서 나온 게 많다. 나는 오랫동안 대기업 CEO를 지냈다. 그 때문인지 정략적으로 나를 공격하는 쪽에서는 내가 서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며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주장하는 복지정책을 볼 때면 이해할 수 없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저분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정말 알까?'라는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지금도 전 국민 무상복지정책으로 정작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복지 예산이 줄어드는 현실을 보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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